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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의 ‘순결’ — 억누르지 말고, 승화시켜라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13장, “순결에 대하여”입니다. 제목만 보면 금욕이나 순결을 강조할 것 같지만, 니체는 정반대 이야기를 합니다.

“순결이 어떤 사람에게는 미덕이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거의 악덕이다.”

니체는 묻습니다. 당신의 절제는 진짜 선택인가, 아니면 그저 욕망을 감당 못 해서 억누르는 것인가?


니체가 비판한 ‘가짜 정결’

당시 기독교 문화에서 정결, 금욕은 절대적 미덕이었습니다. 욕망은 나쁜 것이니 억눌러야 한다고요. 니체는 이게 위선이라고 봤습니다.

“감각을 경멸하는 자들에게 나는 권하고 싶지 않다. 그들의 경멸 자체가 욕정이기 때문이다.”

무슨 말이냐면, 욕망을 억누르는 것 자체가 또 다른 집착이 될 수 있다는 겁니다. 먹고 싶은 걸 참으면서 온종일 음식 생각만 하는 것처럼요. 겉으로는 절제하는 것 같지만, 머릿속은 오히려 그것에 더 사로잡혀 있죠.

니체가 말하는 진짜 정결은 억압이 아니라 초월입니다. 욕망과 싸우는 게 아니라, 그 에너지를 다른 곳으로 돌리는 것.


2026년, 우리가 억누르고 있는 것들

이 장을 읽으며 생각했습니다. 우리도 뭔가를 억누르면서, 그게 ‘절제’라고 착각하고 있진 않을까?

현대판 ‘가짜 순결’:

  • 소비 욕구 — 안 사겠다고 다짐하면서 매일 장바구니만 들여다보는 것
  • 인정 욕구 — SNS 끊겠다면서 은근히 반응 확인하는 것
  • 비교 습관 — 남 신경 안 쓴다면서 계속 비교하는 것
  • 분노 — 화 안 낸다면서 속으로 곪아가는 것

억누른다고 사라지지 않습니다. 니체 말대로, 억누름 자체가 또 다른 집착이 되어버려요.


소소하게 살아가는 우리가 배울 것

니체의 해법은 단순합니다. 억누르지 말고, 방향을 바꿔라.

첫째, 욕망을 인정하기

“이걸 원하면 안 돼”라고 자책하는 대신, “나는 이걸 원하는구나”라고 인정하는 게 먼저입니다. 인정해야 다룰 수 있어요. 부정하면 그림자처럼 따라다닙니다.

둘째, 에너지를 돌리기

니체는 예술가들이 창작열에 빠지면 다른 욕망이 자연스럽게 줄어든다고 했습니다. 몰입할 무언가가 있으면, 억지로 참을 필요가 없어지는 거죠.

꼭 예술이 아니어도 됩니다. 운동, 글쓰기, 공부, 사이드 프로젝트 — 에너지를 쏟을 곳이 있으면 쓸데없는 곳에 마음이 덜 갑니다.

셋째, ‘나에게 맞는 절제’를 찾기

니체는 정결이 “어떤 사람에게는 미덕이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악덕”이라고 했습니다. 남들이 좋다는 습관, 남들이 하는 절제가 나에게도 맞으란 법은 없어요.

아침형 인간이 모두에게 맞는 게 아니듯, 절제의 방식도 사람마다 다릅니다. 중요한 건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방식을 찾는 것입니다.


마무리하며

우리는 절제를 ‘참는 것’으로 배웠지만, 니체는 다르게 말합니다. 진짜 강한 사람은 욕망을 억누르는 사람이 아니라, 그 에너지로 다른 걸 만들어내는 사람이라고요.

지금 억누르고 있는 게 있다면, 그 에너지를 어디로 돌릴 수 있을지 생각해보면 어떨까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저는 그 욕망을 글을 쓰는데 이용하고 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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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의 ‘새로운 우상’이 소소하게 살아가는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

책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11장’, “새로운 우상에 대하여”를 읽었습니다. 니체는 여기서 국가를 ‘새로운 우상’이라 부르며 신랄하게 비판합니다.

“국가라고? 그것이 무엇인가? 자! 이제 내 말에 귀를 기울여라. 그대들에게 민족의 죽음에 대해 말하려고 한다. 국가는 모든 냉혹한 괴물 가운데서 가장 냉혹한 괴물이다. 그 괴물은 냉혹하게 거짓말을 하기도 한다. “

19세기 독일 철학자의 이야기가 2026년을 사는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생각보다 많습니다.


니체가 말한 ‘새로운 우상’이란

니체 시대에 신의 권위가 무너지자, 사람들은 새로운 믿음의 대상을 찾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국가였죠. 국가는 “나는 곧 민족이다”라고 말하지만, 니체는 이것이 거짓말이라고 봤습니다.

국가는 개인의 고유함을 지우고 모두를 똑같이 만들려 합니다.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국가가 정해주고, 사람들은 그 기준에 맞춰 살아갑니다. 니체의 표현대로라면, “너무 많은 사람들이 태어난 곳에서 국가가 발명되었다”는 것이죠.


2026년, 우상은 어디에나 있다

니체가 비판한 건 단지 정부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스스로 생각하지 않고 맹목적으로 따르는 모든 것이 ‘새로운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 주변의 우상들:

  • 알고리즘 — 유튜브와 인스타그램이 보여주는 것만 보고, 그것이 세상의 전부라고 믿는 것
  • 트렌드 — “요즘은 다 이렇게 한다”는 말에 나의 취향과 판단을 포기하는 것
  • 성공 공식 — “이렇게 하면 된다”는 누군가의 프레임에 내 삶을 끼워 맞추는 것
  • 여론 — 다수가 옳다고 하면 옳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니체의 경고는 명확합니다. 이런 것들이 “나는 너를 위한 것이다”라고 말할 때, 의심하라는 것이죠.


소소하게 살아가는 우리가 배울 것

그렇다면 니체처럼 세상과 단절하고 산속에서 살아야 할까요? 그건 아닙니다. 니체도 그걸 말한 게 아닐겁니다.

첫째, 내가 왜 이것을 원하는지 물어보기

“다들 그러니까”, “원래 그런 거니까”라는 이유로 선택하고 있다면, 그건 내 선택이 아닙니다. 직장을 다니는 것도, 투자를 하는 것도, 심지어 이 글을 읽는 것도 — 내가 진짜 원해서인지 한 번쯤 물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둘째, ‘너무 많은 사람들’이 몰리는 곳을 경계하기

니체는 말합니다. “국가가 끝나는 곳에서 비로소 인간이 시작된다.” 모두가 좋다고 하는 것, 모두가 달려가는 곳에서 한 발 물러서서 보는 습관이 필요합니다. 그곳에 진짜 가치가 있는지, 아니면 그냥 군중심리인지.

셋째, 작은 영역에서 ‘나의 것’을 만들기

거창한 혁명이 아니어도 됩니다. 취미, 생각, 글쓰기, 대화 — 작은 영역에서라도 남의 기준이 아닌 나만의 기준으로 무언가를 만들어가는 것. 니체가 말한 “창조하는 자”는 예술가만을 뜻하는 게 아닙니다.

마무리하며

니체를 읽으면 불편해집니다.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흔들리니까요. 하지만 그 불편함이 생각의 시작점이 되기도 합니다.

독서모임에서 이 장을 읽으며 나눈 이야기 중 기억에 남는 게 있습니다. “우리도 결국 무언가의 우상을 따르며 살고 있는 거 아닐까?” 불편하지만, 피할 수 없는 질문이었죠.

여러분은 지금 어떤 ‘새로운 우상’을 따르고 계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