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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의 ‘아이와 결혼’ — 결혼은 목표가 아니라 도구다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20장, “아이와 결혼에 대하여”입니다. 니체가 결혼을 이야기합니다. 예상대로, 평범한 결혼 예찬은 아닙니다.

“너는 젊고 결혼을 원한다. 그러나 내게 먼저 답하라. 너는 아이를 원할 자격이 있는 자인가?”

그대의 소망에는 짐승과 절박한 욕구가 들어있는가? 아니면 고독 때문인가? 아니면 자기 자신과의 불화 때문인가?

그대는 그대 자신을 넘어서 자신을 세워야 한다. 하지만 그대는 우선 그대의 몸과 영혼을 반듯하게 세워야 한다.


니체는 묻습니다. 당신의 결혼은 ‘도피’인가, ‘창조’인가?

니체가 말한 ‘결혼’이란

니체는 결혼 자체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다만 왜 결혼하는가를 묻습니다.

“결혼: 나는 이것을 두 사람이 하나보다 더 큰 것을 창조하려는 의지라고 부른다.”

니체가 보는 좋은 결혼은:

  • 외로워서 하는 결혼이 아니다
  • 사회적 압박 때문에 하는 결혼이 아니다
  • 서로를 소유하려는 결혼이 아니다
  • 둘이 함께 ‘더 높은 것’을 만들어가려는 결혼이다

그리고 그 ‘더 높은 것’의 상징이 바로 아이입니다. 니체에게 아이는 단순한 출산이 아니라, 두 사람이 함께 만들어내는 미래, 가능성, 창조물입니다.


2026년, 우리는 왜 결혼하는가

결혼율은 떨어지고, 비혼 선언은 늘어납니다. 동시에 “결혼해야 한다”는 압박도 여전합니다. 니체의 질문은 지금도 유효합니다.

현대의 결혼 동기들:

  • 나이가 됐으니까 — 주변에서 다 하니까, 적당한 때가 됐으니까
  • 외로우니까 — 혼자 있기 싫어서, 누군가 곁에 있었으면 해서
  • 안정이 필요하니까 — 경제적으로, 정서적으로 기댈 곳이 필요해서
  • 부모님이 원하니까 — 효도 차원에서, 손주 보여드리려고

니체 기준으로 보면, 이건 결혼의 이유가 아니라 결핍의 이유입니다. 내가 부족한 걸 채우려고 하는 결혼은, 상대에게도 나에게도 짐이 됩니다.


소소하게 살아가는 우리가 배울 것

니체의 말이 “그러니까 결혼하지 마라”는 건 아닙니다. “제대로 된 이유로 하라”는 겁니다.

첫째, 혼자서도 괜찮은 사람이 먼저 되기

14장 ‘벗에 대하여’에서도 나왔죠. 고독을 견딜 수 없는 사람은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없습니다. 결혼도 마찬가지입니다. 혼자 서 있을 수 있는 두 사람이 만나야, 기대는 관계가 아닌 함께 가는 관계가 됩니다.

둘째, ‘무엇을 함께 만들 것인가’를 묻기

니체는 결혼을 “창조하려는 의지”라고 했습니다. 꼭 아이가 아니어도 됩니다. 함께 만들어갈 삶의 방향, 가치, 프로젝트. “이 사람과 함께 뭘 만들고 싶은가?”라는 질문이 “이 사람이 좋은가?”보다 중요할 수 있어요.

셋째, 결혼을 ‘도착지’로 보지 않기

결혼하면 행복해질 거야, 결혼하면 안정될 거야 — 이런 생각은 결혼을 목표로 만듭니다. 하지만 결혼은 목표가 아니라 시작점입니다. 거기서부터 뭘 할 건지가 진짜 질문이에요.


마무리하며

니체의 질문은 단순합니다. “너는 왜 결혼하려 하는가? 그리고 그 결혼으로 무엇을 창조하려 하는가?”

결혼을 했든 안 했든, 할 계획이든 안 할 계획이든 — 이 질문은 한 번쯤 스스로에게 던져볼 가치가 있습니다.

여러분의 답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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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의 ‘뱀에 물린 상처’ — 복수하지 말라, 하지만 이유가 다르다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19장, “뱀에 물린 상처에 대하여”입니다. 짧지만 강렬한 장입니다.

짜라투스트라가 나무 아래서 잠들었다가 뱀에게 목을 물립니다. 깨어난 그는 뱀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네 독을 도로 가져가라. 너는 내게 독을 선물할 만큼 부유하지 못하.”

복수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용서해서가 아닙니다. 네가 나를 해칠 자격이 없다는 겁니다.


니체가 말한 ‘복수하지 않는 이유’

보통 “복수하지 마라”는 도덕적 가르침입니다. 복수는 나쁜 것이니까, 용서가 미덕이니까.

니체는 다릅니다. 그의 논리는 이렇습니다.

“네가 적에게 복수하면, 너는 그와 같은 수준에 서는 것이다.”

복수하지 않는 이유는:

  • 용서가 고귀해서가 아니다
  • 복수가 비도덕적이어서가 아니다
  • 상대가 나와 같은 수준이 아니기 때문이다

뱀이 물었다고 뱀처럼 물어뜯으면, 나도 뱀이 됩니다. 니체는 그게 싫은 겁니다.


2026년, 우리가 물리는 ‘뱀’들

우리도 매일 작은 뱀들에게 물립니다. 악의적인 댓글, 뒷담화, 부당한 대우, 배신.

현대의 ‘뱀에 물린 상처’:

  • SNS에서 악플을 단 익명의 누군가
  • 내 아이디어를 가로챈 동료
  • 뒤에서 험담하는 지인
  • 이유 없이 무례하게 구는 사람

물리면 아픕니다. 그리고 본능적으로 되갚아주고 싶어집니다. 댓글로 싸우고, 똑같이 험담하고, 복수를 계획하고.

그런데 니체는 묻습니다. “그렇게 해서 네가 얻는 게 뭐냐?”


소소하게 살아가는 우리가 배울 것

니체의 메시지는 “참아라”가 아닙니다. “네 에너지를 그런 데 쓰지 마라”입니다.

첫째, 상대의 ‘독’을 받지 않기

누군가 악의를 보내면, 그걸 받아서 내 안에 품으면 내가 손해입니다. 화가 나고, 잠이 안 오고, 온종일 그 생각만 하게 되죠. 상대는 5초 만에 잊었는데, 나는 5일을 끙끙댑니다.

“네 독을 도로 가져가라”는 건, 그 감정을 내 안에 들이지 않겠다는 선언입니다.

둘째, 같은 수준으로 내려가지 않기

되갚아주면 시원할 것 같지만, 결국 나도 그 사람과 같은 게임을 하는 겁니다. 뱀에게 물렸다고 뱀이 될 필요는 없어요.

복수 대신 할 수 있는 건? 그냥 내 할 일을 하는 겁니다. 그게 진짜 ‘이기는’ 방법입니다.

셋째, ‘자격’을 따지기

니체는 “너는 내게 줄 만큼 부유하지 않다”고 했습니다. 누군가의 악의에 상처받으려면, 그 사람이 내게 중요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뱀’은 그렇지 않아요.

이름도 모르는 악플러, 별로 안 친한 지인, 스쳐 지나가는 무례한 사람. 이들에게 상처받을 ‘자격’을 줄 필요가 있을까요?


마무리하며

독서모임에서 이 장을 읽고 한 멤버가 말했습니다. “근데 현실에서 이게 되냐? 물리면 화나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

맞습니다. 화나는 건 자연스럽습니다. 니체도 화를 부정하진 않아요.

다만 그 화를 어디에 쓸지가 중요합니다. 상대에게 되갚는 데 쓰면, 나도 그 수준에 머무릅니다. 내 일에 쓰면, 나는 더 높이 갑니다.

짜라투스트라가 뱀에게 한 말을 다시 봅니다. “네 독을 도로 가져가라. 너는 내게 줄 만큼 부유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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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의 ‘천 개의 목표’ — 남의 정답으로 내 인생을 살지 마라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15장, “천 개의 목표와 하나의 목표에 대하여”입니다. 니체가 민족과 가치, 그리고 인간의 목표를 이야기합니다.

“천 개의 민족이 있었고, 천 개의 목표가 있었다. 천 개의 목에 걸린 천 개의 멍에가 아직 없다. 하나의 목표가 아직 없기 때문이다.”

니체는 묻습니다. 당신이 따르는 ‘좋음’은 누가 정한 건가?


니체가 말한 ‘천 개의 목표’

니체는 여러 민족을 예로 듭니다. 그리스인에게 좋은 것, 페르시아인에게 좋은 것, 유대인에게 좋은 것이 모두 다르다고요.

“어떤 민족에게 좋은 것이 다른 민족에게는 수치이고 모욕이다.”

한 민족이 “이것이 선이다”라고 정하면, 그게 그 민족의 가치가 됩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가치를 마치 절대적 진리인 것처럼 따릅니다.

니체의 포인트는 이겁니다. ‘좋은 것’은 하늘에서 떨어진 게 아니라, 누군가가 만든 것이다. 그리고 그걸 만든 건 대부분 그 사회를 지배하는 자들이었다.


2026년, 우리가 따르는 ‘좋음’은 누가 정했나

지금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좋은 삶’의 기준, 그건 어디서 왔을까요?

우리 시대의 ‘천 개의 목표’:

  • 좋은 직장 — 대기업, 공무원, 전문직. 누가 이게 ‘좋은’ 거라고 정했나?
  • 성공의 기준 — 연봉, 집, 차. 이 공식은 어디서 왔나?
  • 행복한 삶 — 결혼, 출산, 내 집 마련. 이게 모두에게 맞는 정답인가?
  • 자기계발 — 아침 5시 기상, 독서, 운동. 이것만이 성장인가?

니체 식으로 보면, 이것들은 “우리 사회가 정한 가치”일 뿐입니다. 절대적 진리가 아니에요. 다른 시대, 다른 문화에서는 완전히 다른 게 ‘좋은 것’이었습니다.


소소하게 살아가는 우리가 배울 것

니체는 기존 가치를 무조건 거부하라는 게 아닙니다. “이게 정말 내 가치인가?”를 물어보라는 겁니다.

첫째, ‘당연한 것’을 의심하기

“원래 그런 거야”라는 말이 나올 때, 한 번 멈춰보세요. 원래 그런 게 아니라, 누군가 그렇게 정한 겁니다. 내가 동의하는지 안 하는지는 별개의 문제예요.

둘째, 내 목표와 남의 목표를 구분하기

부모님이 원하는 삶, 사회가 인정하는 삶, 친구들이 부러워하는 삶. 이게 내가 원하는 삶과 같은가요? 같다면 좋고, 다르다면 다른 대로 인정해야 합니다.

셋째, ‘하나의 목표’를 스스로 세우기

니체는 “아직 하나의 목표가 없다”고 했습니다. 인류 전체의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개인에게도 적용됩니다. 천 개의 남의 목표를 따르지 말고, 나만의 하나의 목표를 세우라는 것.

거창할 필요 없습니다. “나는 이렇게 살겠다”는 작은 선언 하나면 됩니다.


마무리하며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봅니다. “나는 지금까지 누구의 목표를 살아온 걸까?” 쉽게 답하기 어려운 질문 이었습니다. 좋은 대학, 좋은 직장, 안정적인 삶 — 이게 내가 정한 건지, 주변에서 주입된 건지 솔직히 구분이 안 된다고요.

니체는 답을 주지 않습니다. 대신 질문을 던집니다. “네가 따르는 가치는 누가 만들었나? 그리고 너는 거기에 동의하나?”

불편하지만 피할 수 없는 질문입니다. 천 개의 남의 목표 속에서, 나만의 하나를 찾는 것. 그게 니체가 말하는 ‘창조하는 삶’의 시작입니다.

여러분의 ‘하나의 목표’는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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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가 말한 ‘진짜 친구’ — 위로만 주는 사람은 친구가 아니다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14장, “벗에 대하여”입니다. 니체가 우정을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는 따뜻한 우정과는 좀 다릅니다.

“네가 벗 앞에서 있는 그대로의 너를 보여주기 싫다면, 너는 아직 벗을 가질 자격이 없다.”

니체의 우정은 서로 기대는 관계가 아닙니다. 서로를 더 높은 곳으로 밀어올리는 관계입니다.


니체가 말한 ‘벗’이란

니체는 친구를 **”너의 최선의 적”**이라고 표현합니다. 이상하죠? 친구가 왜 적인가.

“너의 벗 안에서 너는 너의 최선의 적을 가져야 한다. 그에게 반대할 때 너는 그에게 가장 가까워진다.”

니체가 말하는 진짜 친구는:

  • 네 말에 무조건 동의하는 사람이 아니다
  • 네가 힘들 때 그냥 “괜찮아”라고만 하는 사람이 아니다
  • 네가 틀렸을 때 틀렸다고 말해주는 사람이다
  • 너를 편하게 두지 않고, 더 나은 사람이 되게 자극하는 사람이다

니체는 또 말합니다. “고독을 견딜 수 없는 자는 친구를 가질 자격이 없다.” 혼자 설 수 없는 사람은 친구에게 기대기만 하고, 그건 우정이 아니라 의존이라는 거죠.


2026년, 우리의 ‘관계’를 돌아보면

SNS에는 친구가 수백 명입니다. 카톡 연락처에도 수십 명이 있죠. 그런데 니체 기준으로 보면, 그중에 진짜 ‘벗’은 몇 명일까요?

현대의 관계 패턴:

  • 위로 자판기 — 힘들다고 하면 “괜찮아, 넌 잘하고 있어”만 반복하는 관계
  • 공감 중독 — 서로 힘든 이야기만 나누고, 거기서 끝나는 관계
  • 표면적 연결 — 좋아요 누르고, 생일 축하 댓글 달고, 그게 전부인 관계
  • 동의 강요 — 내 편 들어주는 사람만 친구로 여기는 관계

니체 기준으로 보면, 이건 우정이 아니라 상호 위안에 가깝습니다. 서로를 성장시키지 않으니까요.


소소하게 살아가는 우리가 배울 것

그렇다고 친구에게 매번 쓴소리만 하라는 건 아닙니다. 니체가 말하는 건 관계의 본질에 대한 질문이에요.

첫째, 혼자 있는 시간을 먼저 견디기

니체는 “고독을 못 견디면 친구를 가질 자격이 없다”고 했습니다. 외로워서 만나는 관계는 서로에게 짐이 됩니다. 혼자서도 괜찮은 사람이 되어야, 누군가와 함께 있을 때도 건강한 관계가 됩니다.

둘째, 불편한 말을 해주는 사람을 멀리하지 않기

“그건 네가 좀 이상한 거 아니야?”라고 말해주는 친구. 듣기 싫지만, 그게 진짜 친구일 수 있습니다. 내 말에 항상 동의하는 사람은 편하지만, 나를 성장시키진 않아요.

셋째, 나도 ‘좋은 적’이 되어주기

친구가 잘못된 방향으로 갈 때, “그래도 네 선택이니까”라고 넘기지 않는 것. 관계가 불편해질 수 있지만, 진심으로 말해주는 게 진짜 우정입니다. 물론 방식은 부드럽게.


마무리하며

독서모임에서 이 장을 읽고 서로 물었습니다. “우리 모임은 니체가 말한 ‘벗’에 가까운가?”

매주 만나서 책 읽고, 서로 다른 해석으로 부딪히고, 가끔은 “그건 좀 아닌 것 같은데?”라고 말하기도 하고. 생각해보니 꽤 니체적인 관계더라고요.

편하기만 한 관계는 좋지만, 거기서 멈추면 서로 제자리입니다. 나를 불편하게 하지만 더 나은 곳으로 밀어주는 사람. 그런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다면, 니체 기준으로 당신은 운이 좋은 겁니다.

여러분에게 ‘최선의 적’이 되어주는 친구가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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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의 ‘순결’ — 억누르지 말고, 승화시켜라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13장, “순결에 대하여”입니다. 제목만 보면 금욕이나 순결을 강조할 것 같지만, 니체는 정반대 이야기를 합니다.

“순결이 어떤 사람에게는 미덕이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거의 악덕이다.”

니체는 묻습니다. 당신의 절제는 진짜 선택인가, 아니면 그저 욕망을 감당 못 해서 억누르는 것인가?


니체가 비판한 ‘가짜 정결’

당시 기독교 문화에서 정결, 금욕은 절대적 미덕이었습니다. 욕망은 나쁜 것이니 억눌러야 한다고요. 니체는 이게 위선이라고 봤습니다.

“감각을 경멸하는 자들에게 나는 권하고 싶지 않다. 그들의 경멸 자체가 욕정이기 때문이다.”

무슨 말이냐면, 욕망을 억누르는 것 자체가 또 다른 집착이 될 수 있다는 겁니다. 먹고 싶은 걸 참으면서 온종일 음식 생각만 하는 것처럼요. 겉으로는 절제하는 것 같지만, 머릿속은 오히려 그것에 더 사로잡혀 있죠.

니체가 말하는 진짜 정결은 억압이 아니라 초월입니다. 욕망과 싸우는 게 아니라, 그 에너지를 다른 곳으로 돌리는 것.


2026년, 우리가 억누르고 있는 것들

이 장을 읽으며 생각했습니다. 우리도 뭔가를 억누르면서, 그게 ‘절제’라고 착각하고 있진 않을까?

현대판 ‘가짜 순결’:

  • 소비 욕구 — 안 사겠다고 다짐하면서 매일 장바구니만 들여다보는 것
  • 인정 욕구 — SNS 끊겠다면서 은근히 반응 확인하는 것
  • 비교 습관 — 남 신경 안 쓴다면서 계속 비교하는 것
  • 분노 — 화 안 낸다면서 속으로 곪아가는 것

억누른다고 사라지지 않습니다. 니체 말대로, 억누름 자체가 또 다른 집착이 되어버려요.


소소하게 살아가는 우리가 배울 것

니체의 해법은 단순합니다. 억누르지 말고, 방향을 바꿔라.

첫째, 욕망을 인정하기

“이걸 원하면 안 돼”라고 자책하는 대신, “나는 이걸 원하는구나”라고 인정하는 게 먼저입니다. 인정해야 다룰 수 있어요. 부정하면 그림자처럼 따라다닙니다.

둘째, 에너지를 돌리기

니체는 예술가들이 창작열에 빠지면 다른 욕망이 자연스럽게 줄어든다고 했습니다. 몰입할 무언가가 있으면, 억지로 참을 필요가 없어지는 거죠.

꼭 예술이 아니어도 됩니다. 운동, 글쓰기, 공부, 사이드 프로젝트 — 에너지를 쏟을 곳이 있으면 쓸데없는 곳에 마음이 덜 갑니다.

셋째, ‘나에게 맞는 절제’를 찾기

니체는 정결이 “어떤 사람에게는 미덕이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악덕”이라고 했습니다. 남들이 좋다는 습관, 남들이 하는 절제가 나에게도 맞으란 법은 없어요.

아침형 인간이 모두에게 맞는 게 아니듯, 절제의 방식도 사람마다 다릅니다. 중요한 건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방식을 찾는 것입니다.


마무리하며

우리는 절제를 ‘참는 것’으로 배웠지만, 니체는 다르게 말합니다. 진짜 강한 사람은 욕망을 억누르는 사람이 아니라, 그 에너지로 다른 걸 만들어내는 사람이라고요.

지금 억누르고 있는 게 있다면, 그 에너지를 어디로 돌릴 수 있을지 생각해보면 어떨까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저는 그 욕망을 글을 쓰는데 이용하고 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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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의 ‘새로운 우상’이 소소하게 살아가는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

책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11장’, “새로운 우상에 대하여”를 읽었습니다. 니체는 여기서 국가를 ‘새로운 우상’이라 부르며 신랄하게 비판합니다.

“국가라고? 그것이 무엇인가? 자! 이제 내 말에 귀를 기울여라. 그대들에게 민족의 죽음에 대해 말하려고 한다. 국가는 모든 냉혹한 괴물 가운데서 가장 냉혹한 괴물이다. 그 괴물은 냉혹하게 거짓말을 하기도 한다. “

19세기 독일 철학자의 이야기가 2026년을 사는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생각보다 많습니다.


니체가 말한 ‘새로운 우상’이란

니체 시대에 신의 권위가 무너지자, 사람들은 새로운 믿음의 대상을 찾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국가였죠. 국가는 “나는 곧 민족이다”라고 말하지만, 니체는 이것이 거짓말이라고 봤습니다.

국가는 개인의 고유함을 지우고 모두를 똑같이 만들려 합니다.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국가가 정해주고, 사람들은 그 기준에 맞춰 살아갑니다. 니체의 표현대로라면, “너무 많은 사람들이 태어난 곳에서 국가가 발명되었다”는 것이죠.


2026년, 우상은 어디에나 있다

니체가 비판한 건 단지 정부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스스로 생각하지 않고 맹목적으로 따르는 모든 것이 ‘새로운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 주변의 우상들:

  • 알고리즘 — 유튜브와 인스타그램이 보여주는 것만 보고, 그것이 세상의 전부라고 믿는 것
  • 트렌드 — “요즘은 다 이렇게 한다”는 말에 나의 취향과 판단을 포기하는 것
  • 성공 공식 — “이렇게 하면 된다”는 누군가의 프레임에 내 삶을 끼워 맞추는 것
  • 여론 — 다수가 옳다고 하면 옳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니체의 경고는 명확합니다. 이런 것들이 “나는 너를 위한 것이다”라고 말할 때, 의심하라는 것이죠.


소소하게 살아가는 우리가 배울 것

그렇다면 니체처럼 세상과 단절하고 산속에서 살아야 할까요? 그건 아닙니다. 니체도 그걸 말한 게 아닐겁니다.

첫째, 내가 왜 이것을 원하는지 물어보기

“다들 그러니까”, “원래 그런 거니까”라는 이유로 선택하고 있다면, 그건 내 선택이 아닙니다. 직장을 다니는 것도, 투자를 하는 것도, 심지어 이 글을 읽는 것도 — 내가 진짜 원해서인지 한 번쯤 물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둘째, ‘너무 많은 사람들’이 몰리는 곳을 경계하기

니체는 말합니다. “국가가 끝나는 곳에서 비로소 인간이 시작된다.” 모두가 좋다고 하는 것, 모두가 달려가는 곳에서 한 발 물러서서 보는 습관이 필요합니다. 그곳에 진짜 가치가 있는지, 아니면 그냥 군중심리인지.

셋째, 작은 영역에서 ‘나의 것’을 만들기

거창한 혁명이 아니어도 됩니다. 취미, 생각, 글쓰기, 대화 — 작은 영역에서라도 남의 기준이 아닌 나만의 기준으로 무언가를 만들어가는 것. 니체가 말한 “창조하는 자”는 예술가만을 뜻하는 게 아닙니다.

마무리하며

니체를 읽으면 불편해집니다.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흔들리니까요. 하지만 그 불편함이 생각의 시작점이 되기도 합니다.

독서모임에서 이 장을 읽으며 나눈 이야기 중 기억에 남는 게 있습니다. “우리도 결국 무언가의 우상을 따르며 살고 있는 거 아닐까?” 불편하지만, 피할 수 없는 질문이었죠.

여러분은 지금 어떤 ‘새로운 우상’을 따르고 계신가요?